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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부상자, 전두환 사망 몇 시간 전에 총상 휴유증으로 스스로 목숨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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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장례식장은 조용
늦게 도착한 사진을 제단 위에 올려놔

 

고인은 이마 너머로 누군가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전두환 씨가 돌아가신 날 또 한 명이 숨진 채 발견됐는데 5.18 이 분이 총에 맞고 다친 이광영 씨입니다.

이씨는 총상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68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5·18 40명 이상이 부상자로 확인되어 이씨와 같이 모두가 총상과 구타, 정신적 외상에 시달렸습니다.

5·18 진상규명을 견뎌온 이들은 전두환의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광영이 23일 오후 전남 강진의 한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그것은 이씨의 고향 근처에 있는 저수지였습니다.

집에 유서를 남기고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가족들의 신고가 있은 후였습니다.

 

이씨는 A4 유서의 절반을 남겼습니다. 배게 맡에 남긴 유서 봉투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씨는 유서에는 "5.18에 대해서는 원한도 없거니와 작은 서운함들은 다 묻고 가니 마음이 홀가분하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는 "나의 이 각오는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바, 오로지 통증에 시달리다 결국은 내가 지고 떠나감이다"라고 썼습니다.

결국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 곁으로 가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승려가 된 이광영은 1980년 5월 광주에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생신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봤던 계엄군의 만행을 보고 광주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씨는 광주에 머물며 쓰러진 시민들을 병원에 이송했습니다.

골목길에서 총에 맞은 시민을 태우던 이모씨도 총에 맞았습니다. 이광영이 트럭에 오르자마자 총성이 울렸습니다.

계엄총탄이 이씨의 등골을 관통했습니다. 큰 수술 후 목숨을 건졌지만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하지만, 그는 5·18 진상 규명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1988년 국회 청문회에 참석했고 2019년 전두환 씨의 5·18 명예훼손 재판에서도 증인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이씨는 이날 법원에 앞서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헬기가 두 번 이동하면서 내가 타고 있는 차량을 집중적으로 사격했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며 정씨가 헬기 사격을 부인하는 것은 "우리 역사와 우리 국민을 무시하는 엄청난 큰 죄를 짓는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가 본 상황은 하늘이 무너져도 진실입니다"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씨의 가족과 지인들은 이 씨가 평생 총상으로 힘들어해왔다고 말합니다. 최근에 통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광영의 절친이었던 강상원 씨는 통증이 2~3분 간격으로 왔다며 "그저께 조선대병원에 통원치료를 데리고 가려고 전화통화 한 게 마지막 통화가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이씨의 동생 이광성씨도 이씨가 요즘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동생 이광성씨는 올해 9월과 10월 마약성 진통제의 부작용인 위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씨는 오른발로 운전할 수 있었지만 최근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죽기 며칠 전 심한 통증과 두 번의 교통사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생은 "형님이 그때부터 한계를 느낀 것 같다"고 울먹였습니다.

 

 

 

 

 

46명의 사람들이 5월 18일에 부상을 입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25명, 1990년대에는 5명, 2000년대에는 12명이었습니다. 그 비율은 1980년 이후 10년 동안 높았습니다.

그 후 1990년대에 감소했지만, 2004년에는 한 해 동안만 7명이 사망했습니다.

정부 공식 통계가 아닌 5월 단체와 학계의 연구 결과까지 나온 것입니다.

이 단체는 지난 5월, 5·18 사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숨지거나 다쳤는지에 대한 정부 조사가 없었다며 하소연했습니다.
전씨의 사망이 있기 불과 몇 시간 전 이광영씨가 먼저 숨졌지만 진상규명에 대한 이씨의 의지는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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